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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충청북도

시인묵객이 시화로 예찬한 사인암


사인암

운계천가에 수직으로 우뚝 솟은 사인암은 석벽에 가로세로 바둑판 무늬가 선명하고 그 위에는 푸른 청송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사인암은 역동 우탁에 의해 명명된 경승이다. 고려 말 정주학의 대가였던 우탁은 단양군 현곡면 적성리에서 태어났다. 충렬왕 4년에 항공진사가 되어 관직에 나간 후 여러 직에 보임되었다.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당시 감찰규정이었던 역동은 흰 옷을 입고 도끼를 든 채 궁궐에 들어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군주의 비행을 직간한 역동의 기개와 충의를 본 충선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우탁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우탁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했을 때 민간신앙이었던 팔령신(八鈴神) 때문에 백성의 폐해가 심하자 신사를 철폐하는 혁신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벼슬을 버린 후에는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우탁이 ‘사인(舍人)’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 사인암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했다. 그래서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임재광이 우탁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사인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인암은 마치 해금강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석벽이다. 깎아지른 듯 하늘을 향해 뻗은 수직의 바위가 거대한 단애를 이루고 암벽의 정수리에는 늘 푸른 창송이 꼿꼿이 자라고 있다. 사인암은 기품이 넘치는 장엄하고 우뚝한 자태를 자랑한다. 바둑판 모양이 선연한 암벽의 격자무늬와 푸른 노송의 어우러짐은 기묘한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운계천의 맑은 물이 푸르고 영롱한 옥색 여울이 되어 기암절벽을 안고 도는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난 운선구곡의 하나다. 소백산의 정기가 모인 물줄기가 서쪽으로 흐르다 급히 돌아 북으로 굽이치고 다시 돌아 동남으로 흘러가는 운계천은 물이 옥같이 맑고 산수의 풍광이 아름답다. 이러한 운계천의 절정을 이루는 사인암은 마치 속세를 떠난 듯하며 암벽에는 역동 우탁의 글이 새겨져 있다.





사인암의 신비로운 선경은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을 불러들였다. 추사 김정희는 “속된 정과 평범한 느낌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다(俗情凡韻一毫無)”며 하늘이 내린 그림이라고 경탄했다. 추사 외에도 사인암의 선경을 묘사한 시문은 매우 많다. 신광수의 〈단산별곡(丹山別曲)〉, 한진호의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 오대익의 〈운선구곡가(雲仙九曲歌)〉 등이 사인암의 비경을 담고 있으며, 김홍도와 이방운 등 조선의 이름난 화가들도 아름다운 절경을 화폭에 진경산수의 필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단양에는 다섯 바위가 있다.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운암, 그리고 사인암이다. 정조임금은 김홍도를 연풍현감에 제수하여 영풍, 단양, 제천, 청풍의 산수를 그려 오라 했다. 김홍도가 사인암에 이르러 그리려 했지만 10여 일을 머물면서 노심초사했다.
- 한진호, 《도담행정기》 중에서






산수화, 인물화, 불화, 풍속화에 모두 능했던 단원 김홍도조차 선경에 압도될 만큼 사인암의 풍광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김홍도가 그린 〈사인암도(舍人岩圖)〉는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으로 알려진 《단원절세보(檀圓折世寶)》에 들어 있다. ‘절세보’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보물이라는 뜻으로 김홍도가 이 화첩의 그림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인암도〉를 비롯해 도담삼봉, 옥순봉 등 단양의 절경을 그린 단원의 그림을 실경산수라 한다. 중국의 관념산수와 비교하면 당시 조선 화단에서 이룩한 실경산수화법은 자연풍경의 묘사가 실제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수많은 산수화의 대상이 된 사인암은 장대한 기암절벽, 늘 푸른 소나무, 벽옥 같은 맑은 물이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신록과 단풍, 설경으로 변화무쌍한 경관을 보여주는 경승이다. 사인암은 지리적 표지로 강하게 인지되는 대상이어서 《대동지지(大東地志)》와 《해동지도》를 비롯해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사인암은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운계의 북쪽 들판 상류와 선암 사이를 산 하나와 흐르는 물이 가로막아 동서로 깊고 큰 골짜기를 이룬다. 계곡을 굽어보며 겹겹이 쌓인 절벽의 높이가 48~49길이고 둘레는 15~16아름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사인암에 있는 사선대(四仙臺)와 서벽정(棲碧亭)의 기록도 남아 있다.






지질사적 관점으로 보면 사인암은 석회암 지대에 관입한 화강암이 하천의 반석 위에 세워진 병풍 모양의 수직절리면이다. 다양한 색깔로 드러난 수직 수평의 절리면이 마치 수많은 책을 쌓아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신비로운 비경을 지닌 사인암은 옛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이곳을 찾는 탐방객까지도 매료시키고 있다.






기암절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옛날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현재 사인암에는 우탁의 글이 남아 있고 개울가 바위에는 수많은 시인묵객의 이름,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순장바둑(우리 고유의 재래식 바둑)판도 새겨져 있다. 또한 “청산의 눈 녹인 바람을 빌어다가 귀 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라는 우탁의 〈탄로가(嘆老歌)〉 2수를 적은 시비와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남한강 줄기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 단위였던 청풍, 단양, 제천, 영춘의 경치는 산수풍경으로는 첫손에 꼽힐 만큼 아름답다고 많은 시인묵객들이 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양팔경의 사인암은 시화의 주제로 가장 많은 대상이 된 곳이자 옛 선인들이 아끼고 사랑한 명승이라 할 수 있다.




































































































































1월 13일

날씨는 변화무쌍하였고,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주차장에서 사인암까지 가는데 저절로 어휴 추워 ~~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스카프 꺼내서 둘둘 감고도 웅쿠리고 다녔다

손끝이 시려워 사진 찍는데 호호 불어가며 찍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