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팔영산(八影山)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아도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417년(눌지왕 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하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창건자의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2001년 보물로 지정된 고흥 능가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당 · 종각 · 천왕문(天王門) · 요사채 등이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350여 년 전에 나무로 만든 뒤 개금한 불상 8위와 나무로 만든 뒤 도분(塗粉)한 불상 22위, 197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높이 157㎝의 능가사 범종과 4.5m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높이 5.1m의 고흥 능가사 사적비가 197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중 사적비는 1726년(영조 2)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광희(廣熙) · 사영당(泗影堂) · 추계당(秋溪堂) 등의 부도(浮屠) 8기가 있다.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일본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7일 만에 승려가 나타나서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속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서불암(西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팔영산 능가사는 처음 방문이었는데
대웅전 들어가 부처님전에 인사 올리고 나서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왔다
부처님을 마주하고 앉았는데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혼자서 넋두리를 늘어 놓기도 하였다
간절한 마음으로 서원을 발원하면서 ... 발원한 서원이 모두 이루어 지기를요. _()_ ^^
새로 지었나 보다
'대루'
평지에 있는 사찰 능가사는 부지가 넓어서 빈 공간도 많이 있었다
범종루 뒤로 팔영산 팔봉이 살짝이 보인다.
목련나무와 범종루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고흥능가사강희37년명동종(高興楞伽寺康熙三十七年銘銅鍾)으로 불린다. 높이 157㎝, 무게 900kg의 범종의 세부를 보면 용뉴(龍紐: 종 꼭대기 부분의 장식)는 쌍룡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甬筒]을 두지 않고 그 자리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음관을 대신하고 있다. 범종의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벌어지는 형태로, 외형은 ‘여수 흥국사 동종(보물, 2008년 지정)’과 유사하다.
연못이 있었다
그 가운데 비석에 써 있는 글의 뜻이 뭘까 ?
고목 느티나무가 여러그루 있었다
항아리와 연못 나무가 잘 어울리는 풍경이 좋아서 담아 보았슴. ^^
연못엔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며 놀고 있고,
스님께서 연못주위를 살펴보며 걷고 계셨다
보물 제1307호 지정된 '대웅전'
대웅전 (보물 제1307호)
오후시간이라 사람들이 없어 조용하였다
팔영산 영봉이 시원하게 보인다
높아 보이지 않아서 등산하고 싶었지만 ......... 참아야지. ^^
녹음이 짙어진 나무들은 싱그럽다
팔영산 다시한번 더 담아보고
종무소였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대루'
스님들 계시는 요사채
응진전
응진전과 사적비각
5층석탑
고흥 능가사 사적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능가사 사적비는 영조 26년(1750)에 능가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을 기록한 비석이다
사적비란 장소나 인물 등과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석을 말한다
이 사적비는 등에 팔쾌를 새긴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두 마리의 용과 구름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머릿돌로 이루어진 완전한 형태의 비석이다.
비석 앞면에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보현사' 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내용과 정현대사 벽천이 중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절터를 발견한 후 인조 22년(1644)에 사찰을 다시 짓고 '능가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비문은 오수채 (1692~1759)가 지었으며, 조명교(1687~1753)가 글씨를 썼다.
비석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적었는데,
비문의 능가사에서 출가한 승려 약탄(1668~1754)이 짓고, 김사국이 글씨를 썼다.
사적비를 나와서 요사채가 있는 뒤로 걸어 나가본다
대숲이 있었다
팔영산 야영장 가는 길
능가사 담장을 끼고 걸어 나온다
차타고 지나다가 본 팔영산 전경을 담아 보았다
바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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