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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전라도

해남 달마산 미황사.

 

 

 

방생 삼사순례 두번째 방문지.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247번지 <전화>061, 533-3521.

대한불교조계종  제 22교구 달마산 미황사. 

 

 

두륜산대흥사를 방문하고 방생을 미치고 미황사에 도착을 하였다.시간이 오후 2시40분 쯤이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한치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우째 이런일이....... ^^

우산을 쓰고 가는 데 안개속을 걸어가는 기분, 묘하게 좋다. 운치있는 산사의 방문이다.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날씨 덕에 구름위를 날으는것처럼 마음이 붕 ~ 떠오른다.

사진을 찍는 나로서는 더욱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참으로 센치해지는 기분이었다.

 

 

미황사 창건 역사.

미황사는 통일 신라 때인 경덕왕 8년(749)에 의조스님이 창건했다. 당시엔 <화엄경>을 중시하며 여러불상을 모신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때 미황사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무외 스님이 "도솔암

북쪽에는 서굴이 있는데 신라때 의조 스님이 낙일관을 수리하여 살던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와 통교사가 있다."

고 적고 있다. 또한 중국 남송 사람들이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라며 이곳을 칭송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조선시대 전기에도

절 규모는 꾸준히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1597)이 지역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건물이 불타버리고

기록마저 없어져 버렸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는 1754년 (영조 30년)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수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보전 보수공사 때 발견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중창을 했고, 그 뒤 1658년(효종9년) 에서 1660년

까지 성간, 수신 두 스님에 의해 중수를 했다. 그 뒤에 1757년(영조 27)에 덕수스님에 의헤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 중수를 하였다. 연담 유일(1720~1799) 스님은 미황사에 머무르며 천변불사소 (川邊佛事疏)천변시왕소문

(川邊十王疏文)을 지어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세 수륙도량(水陸道場)을 개설하고 쾌불을 내어 모시고

법회를 열었다. 1858년(철종9년)에는 의현(1816~1874) 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만일회는 아미타 기도 만일간의 법회인데 초의 스님의 <미황사만일회기>에 내용이 나온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 후기에

걸쳐 융성을 거듭하다 100여년 전 중창을 위해 모금을 하어 풍물패를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당하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퇴락한지 100여년이 흐른 뒤 현재 이곳에 머무는 지운 , 현공, 금강스님이 1989년에 주인없이

비어있던 미황사에 오게 되었다. 흔적만 남아있던 명부전, 삼성각, 종각, 만하당, 달마전, 자하루, 백운당, 청운당, 부도암

등을 복원하고, 낡은 세심당과 염화실, 향적전을 증축하였다. 15년 넘게 이어진 중창 불사 결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창건설화.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돌 배 한 척이 땅끝마을 사자포구에 와서 닿았다.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는 번번이 멀어져갔다. 의조스님이 이를 듣고, 장운, 장선 두 스님, 향도 백 여 명과 함께 목욕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돌 배가 바닷가에 닿았는데 그 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을 살피니 <화엄경>

7권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 탱화등이 있고 금 가락지, 검은 돌이 한 개씩 잇엇다. 마을 사람들이 경전을

바닷가에 내려놓고 모실 장소를 의논할 때 검은 돌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그날 밤 의조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전과 부처님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이른 것이다. 소에 경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 고 일렀다. 이에 소 등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눕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걸어갔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소가 처음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뒤에 누워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미황사(美黃寺) 를 지어 불상과 경전을 모셨다. 미황사의 '미' 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에서 따왔고, '황' 은 금인(金人)

의 황금빛을 따와 이름 붙혔다. 1692년(숙종18)에 민암이 지은 <미황사사적비>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이 같은 미황사 창건

설화는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여서 새삼 흥미롭다.

 

 

대웅보전(大雄寶展)

대웅보전(보물947호)은 1982년에 보수 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에 의하면 응진당과 함께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597년네 줄창하여 1751년과 1982년에 중수 하였다. 천장에는 범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1천 명의 부처님 때문에 이곳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는 격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대웅보전은 찬건설화에 나오는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중생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는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응진당(應眞堂)

응진당(보물1183호)은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 중에서 아라한과를 얻은 뛰어난 제자들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당이 외벽 담을 두르고 서 있다. 응진당에는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다.그리고 그 둘레로 16나한상,인왕상,시자상, 동자상 등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線筆)의 경지를 보여준다. 응진당은 1982년 대웅보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대웅보전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597낸에 중창하여 1751년과 2001년에 중수 하였다. 응진당 마당은 사찰 경내에셔 가장

높은 곳이라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해질녁 진도와 주변 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부도전(浮屠殿)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석조물을 말한다.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부도는 대부분 사찰 밖에 있다.

미황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웅보전에서  세심당을 지나 남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5백 미터 쯤 올라가면 동쪽에

21기의 부도와 5기의 탑이 있는 부도전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1백 미터 쯤 되는 곳에 6기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모두 조선 후기인 1700년경부터 세워졌다. 부도에 모셔진 스님들은 조선 후기 대흥사와 미황사 대중의 존경을 받던 큰

스님들로 조선후기 화엄의 대가로 꼽히는 연담 유일스님을 비롯해서 대흥사 12종사의 한 분인 벽하, 설봉 스님 그리고

정련, 정암, 송파, 낭암 스님 등 당시의 내노라 하는 스님들이다. 이 부도전으로 하여 당시 미황사의 산세나 이곳을 중심으로

정진했던 스님들의 수행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괘불(掛佛)

괘불이란 어디에 내거는 불교 그림이라는 뜻이가.미황사 대웅전 안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과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조선

불화의 단순미를 고루 간직한 괘불이 모셔져 있다. 이 괘불은 조선 후기 (영조3년1727년) 것으로 높이가 12m, 폭이 5m아 되는

큰 것이다. 워낙 커서 괘불을 거는 데만 10여명의 사람이 필요하다. 이 괘불은 다른 괘불처럼 야외 법회 때 걸기도 하지만 가뭄이

 극심할때 이 괘불을 걸고 제사를 지낸 뒤 달마산 정상에 올라 불을 지피면 비를 내려준다 하여 기우제 때 사용하기고 했다.

실제로 1992년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를 지내고 서너 시간이 지나자 달마산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괘불은 (보물 1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과 10대 시왕상.

명부전은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시왕상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의 입멸 후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는 모든 중생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로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의 중생을 재도하는 역할을 맏고 있다.시왕은 저승에 있는 열명의 심판관이다. 명부전안의 10대 시왕을 조각한 사람은 국보로

지정한 '자화상' 을 그린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이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절 근처 은행나무를 베어 10대시왕을 조성했는데 그 뒤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네 번째 시왕은 실수로 두 눈의 크기를 다르게 조각했는데 그의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삼성각의 산신, 칠성, 독성탱화.

산신, 칠성, 독성이 함께 모셔져 있어 삼성각이라 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민족 고유의 토착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호랑이를 타고 앉은 조각상의 주인공이 산신으로 산신탱화에는 중앙에 산신이 자리하고,좌우에

동자와 여인이 배치되어있다. 독성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한 나반존자를 일컫는다. 미황사 독성탱화에는 천태산과

소나무, 구름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스님이 왼손에 염주를 찬 모습으로 동자, 여인과 함께 그려져 있다. 칠성은 수명을

길게 한다는 칠성신을 말한다. 칠성은 중국의 도교와 관련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불교화하였다.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하고, 수명을 연장해준다 하여 민간에 깊이 뿌리내린 신앙이다.

미황사 삼성각에 모셔진 탱화 3점은 모두 1943년에 조성하였다.

 

 

미황사 사적비

부도전에서 내려오면 길 오른쪽 축대 아래에  폭 1,3m 높이2,9m 정도의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미황사 사적비' 로

이 근처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통교사가 있던 자리로 보인다.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쓴 이 사적비(숙종 18년, 1692년)

에는 미황사의 창건설화가 전한다.

 

 

대웅보전 기둥에 새겨진 거북이

창건설화를 보면 인도에서 경전과 부처님상을 싣고 땅끝 사자포구에 배가 한 척 닿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배의 상징으로 대웅보전을 지었고 바다에 사는 게와 거북이를 기둥의 주춧돌에 새겨 대웅보전이 배임을

묵언 중에 설명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단청.

단청은 일반 건축물과 달리 법당이나 궁궐의 권위를 나타낼 목적으로 건물에 그린 그림이다.

또 바람이나 나무를 썩게 하는 여러 원인들로부터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기도 했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경우  건물 안을 보면 벽화가 그려져 있듯 외벽에도 단청을 했었다. 그러나 1754년

건물을 중수할 때 단청을 했으나 250여 년이 넘는 동안 바닷바람 등의 영향으로 그 고운 색이 바랬다.

 

 

대웅보전 기둥의 나무.

느티나무이다. 느릅나무과 낙엽송인 이 나무는 우리나라, 일본, 몽골, 중국 등지에 분포해 있다.

주로 동네 어귀에 심어 마을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느티나무이다.

이 나무는 질이 매우 튼튼하고 굵어서 생활용품이나 집을 지을 때 사용했다.

 

 

대웅보전 안의 1천명의 부처님.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은 그의 책 <임하록>에서 "미황사는 예부터 1천불이 출연할 곳이다."

라고 적고 있다. 스님들은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열심히 수행 정진하였고 1천불의 출연을 염원하며 벽화를 그렸다.

 

 

단청이 전혀 되어있지않은 대웅전, 그대로의 나무결이 더 아름답다.

대웅보전 앞 기둥에 세겨진 학과 용의 무늬가 만지면 살아있는 용을 만지듯. 학을 만지듯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주 부드럽게....

 

 

 

 

 

 

 

 

 

 

 

 

안개 속에 휩싸여 바로 앞에있는 전각도 히미하게 보인다.

응징전에서 보이는 바다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보지못한게 아쉽기는 하지만 운무에 가려진 미황사도 운치있고 좋다.

 

 

 

 

 

 

 

 

 

 

 

 

 

 

 

 

 

 

 

 

 

 

 

 

 

 

 

 

 

 

 

 

 

 

 

 

 

 

 

 

 

 

 

 

 

 

 

 

 

 

 

 

 

 

 

 

 

한폭의 수묵화를 보듯,

안개속에서 헤메이다 왔다.

비가 내려 안개가 많이 있었지만 유난히 더  미황사를 덮고 있었다.

하늘에서 용들이 내려와 노닐다 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할것 처럼 은은하게 퍼져있는 안개가

나는 참 좋았다.

구름을 타고 놀다온 기분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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