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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경상남도

법보사찰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있는 '해인사'를 다녀왔다.

 

해인사와 백련암에 가고싶어 6월 17일 일요일. 

부산에서 출발 하였다

경남 합천군 갸야면 해인사길.

계곡이 아름다운 홍류동천을 걸어서 지나왔다

홍류동천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녹음이 짙은 숲과 기암들이있어 더욱 빼어난 아름다움이었다

법보종찰가야산해인사 라고 써 있는 산문을 지나 성보박물관에 도착을 하였고,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 고광루를 지나,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있는 대적광전. 뒤로 팔만대장경이 있었다

대적광전 옆으로 학사대와 독성각이 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한 절이다. ‘해인’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비롯되었는데, 해인삼매는 우리 마음의 번뇌 망상이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선원, 강원, 율원이 함께 하는 최초의 총림이다.

해인사를 두고 있는 가야산은 높이가 해발 1,430m이며, 우뚝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신령스러운 산이다. 이곳의 돌과 물, 붉은 소나무숲은 다른 절이나 명산에서도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애장왕 2년(802)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2백여 년간 7차례나 불이 나서 건물 대부분이 타버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들이다. 현재 절 안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서 1251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완성된 호국안민의 염원이 담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있다. 그 밖에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이 있다. 뛰어난 가야산의 자연경관과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해인사 지역의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해인사 홈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해인(海印)”
옛날 가야산에는 자식 없이 외로이 살고 있던 노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와 정성을 다해 키웠더니, 3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원래 용왕의 딸인데 죄를 지어 인간세상으로 쫓겨나 3년 동안 개 노릇을 하라는 벌을 받았는데, 이제 3년이 지나 다시 용궁으로 돌아가니 그동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저의 수양부모님이 돼 주시면 며칠 후 사자를 보내드릴 테니 사자를 따라 용궁으로 오세요. 그리고 용왕님이 무슨 보물을 갖고 싶냐고 물으면 ‘해인’이라는 도장을 달라고 하세요” 하고는 사라졌다. 며칠 후 용궁에서 온 사자를 따라간 노부부는 용왕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용왕이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하자, 부부는 해인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용왕은 “이것은 귀한 물건이니 절을 지어 보관하면 그 절은 번성할 것이오”라고 말하며 해인을 건네주었다.
노부부가 가야산에 돌아오니 애장왕이 가야산에 절을 짓고 있어 왕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하고 해인을 내놓았다. 애장왕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해인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해인사’라 지었다. 그때부터 해인사에는 숨겨진 해인을 얻으면 신통력을 부릴 수 있고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해 인 사 성 보 박 물 관

 

 

 

 

녹음이 짙은 해인사 가는길.

 

 

 

 

 

 

 

 

 

일주문 안으로 들어선다.

 

 

 

 

 

 

 

 

 

고사목 (枯 死 木)

이 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감사하여 두 스님이 수행하던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데. 이때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枯死)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사천왕문

 

 

 

 

불이문

 

 

 

 

구광루

 

 

 

 

 

 

 

 

 

범종루 앞 연등.

 

 

 

 

대적광전

 

 

 

 

고광루 앞으로 정중삼층석탑 과 석등.

 

 

 

 

 

 

 

 

 

 

 

 

 

 

 

 

 

 

 

해인사 이름의 유래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海印)' 이라는 단어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은 대승경정의 최고봉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해인삼매(海印三昧)' 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것이다.

 

대적광전

 

이렇게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래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로써 해인사는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화엄사상을 펼치기 위한 사찰로 창건 되어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大寂光展)이다.

비로자나불의 손 모습을 지권인(智拳印)으로 부르며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손모양이다.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나타내는 것이며 부처와 중생, 미혹과 깨달음이 하나임을 뜻하는 것이다.

 

 

또 한 해인사를 구성하는 전체 건물 배치의 중심이 되는 곳에 구광루(九光樓)를 세운 점도 독특하다.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보광법당을 비롯하여 일곱 곳에서 아홉 번(七處九會) 설법하시고 중생을 교화하셨다고 한다.

매번 설법하실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그 빛이 비치라고 백호(白毫)에서 광명을 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한 다음 기쁜 마음으로 설법하셨다고 한다. '구광루' 하는 건물 이름은 부처님께서 아홉번 빛을 낸 사실에 연유한다.

구광루 건물의 정면이 7칸인 것은 역시 부처님이 설법한 7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대적광전의 동(법보단),서(금강계단),남(대적광전),북(대방광전)으로 현판글이 다르게 써있다.

 

 

 

 

 

 

 

 

 

독성각

 

 

 

 

 

학사대(學士臺)

학사대는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서(詩書)에 몰입하였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거꾸로 꽂아 두었다고 전해지는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지가 아래로 쳐져 거꾸로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학사대 옆에 있던 소나무.  멋져서 ~

 

 

 

 

가야산 감로수.

맛이 시원하고 참 달다.

 

 

 

팔만대장경.

 

 

 

 

 

 

 

 

 

사진촬영 불가.  포토존에서 ~

 

 

 

 

 

 

 

 

 

 

 

 

 

 

 

 

 

 

 

 

 

 

 

 

 

 

 

 

 

 

 

 

 

 

 

 

 

 

 

 

 

 

 

 

 

 

 

 

 

 

 

 

 

 

 

 

 

 

 

 

 

 

 

 

 

 

 

 

 

 

구광루 안에 부처님 진신사리.

 

 

 

 

사천왕문을 나서며~~

 

 

 

 

작품설명

부처상의 보이지않는 반쪽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불성을 내포하며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진솔한 내적 성찰의 무한대를 제시한다.

 

 

 

 

 

 

 

 

 

 

 

 

 

 

 

 

 

당간지주.

 

 

 

 

영지(影池)

가야산의 정상이 이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영지라 부른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 칠불봉으로 출가한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여 가야산을 찾았으나 산에 오를 수 없어 아들들의 그림자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러자 정진 중인 왕자들의 모습이 이 연못에 비쳤다고 전한다.

 

 

'법보종찰가야산해인사' 산문을 나가는데 ~

'홍류문' 이라 써있다.